[유일이 보는 세상] 삶무게 사람 향기

기사입력 : 2016년 03월 03일

바다 느낌 톤레삽

저 배 바다를 산보(散步)하고
난 여기 파도 흉용(洶湧)한 육지를 항행(航行)한다.
내 파이프 자욱이 연기를 뿜으면
나직한 뱃고동, 남저음(男低音) 목청.
배는 화물과 여객을 싣고
나의 적재 단위(積載單位)는
‘인생(人生)’이란 중량(重量).
한국의 입춘지절 즈음에 바삭 강변에서 배를 타고 시엠립으로 향했다. 8시간째 접어드는 목적지 부근 안구(眼球)를 놀래키는 톤레삽 호수는 깔축없는 바다였다. 문득 고교 시절 가슴을 울렸던 위의 시가 배를 따르는 갈매기마냥 머릿속으로 날아들었다.
작품은 대만의 한시(漢詩)로 인터넷을 뒤지니 원시는 6행 번역시는 7행이어서 번역을 따라 옮겼다. 마지막 행을 번역자가 둘로 나눈 것인데 끝 행이 시의 맛을 잘 살린 느낌이다. 여지껏 기억된 이유도 인생을 ‘중량(重量)’으로 묵직하게 본 멋에 이끌린 때문 아닐까 싶다.

남저음 뺨칠 매력 품은 묵직한 음색의 여가수가 부른 노래도 시를 따라 떠올랐다. 가사 전체 맥락은 사랑을 잃고 슬픔에 빠진 자의 넋두리로 다가온다. 그런데 기가 막힌 명구인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 한 구절은 인구에 회자(膾炙)되며 많은 이들의 감성을 두드려 왔다.
오늘의 연상 동력이 인생이 주는 부담감 내지는 무게였기 때문에 노래는 그 부분만을 따온다. 앞서 적은 것처럼 주제가 실연에서 오는 상실감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용한 구절만큼은 인생의 고달픔을 너무도 실감 충만(充滿)하게 그려 보여준다.
그 감정에 중독되어 나는 노래방에 가게 되면 가끔은 이 노래를 부른다. 원곡 가수의 풍부한 감성에는 어림도 없지만 워낙 절절한 곡이라서 그 부분에 이르면 여지없이 울림의 태풍을 몰아온다. 어느 누구 인생인들 감당하기 어려운 ‘등짐’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인가.

그러자 삶을 짐으로 본 다른 사례 하나가 슬그머니 뒤통수를 긁어댔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길과도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소설 ‘대망’에서 만난 생각들이다.
프놈펜에서 4시간쯤 달렸을 무렵 조금 작은 규모의 배로 모두 옮겨 탔다. 아마도 수량이 줄어들며 그 유역에선 큰 배가 지날 수 없을 정도로 수심이 얕아지는 탓이라고 짐작되었다. 듣기로 3월경엔 이 선박의 운항이 멈춘다는데 지나는 지점의 건기 수량이 여객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깃발 꽂힌 수로 따라 조심스레 발 내딛던 배는 시간이 지나며 거대 호수 톤레삽으로 들어섰다. 주변은 삽시간에 끝 모를 바다처럼 사방이 망망한 수면으로 그득해졌다.
지붕으로 올라가도 좋으냐 물으니 선장은 흔쾌히 허락한다. 이런 행동은 안전제일의 선진국 우리나라에선 허용될 수 없는 일이라 여기가 캄보디아임을 감사하였다. 홀로 지붕 뒷전 안전봉들 새로 다리를 내리고 앉아 스크루를 내려다보니 배는 세 갈래 물줄기를 뒤로 늘이고 있다. 한 쪽에 처음 인용한 시 ‘배’가 보였고 반대편 가닥엔 ‘등이 휠 것 같은’ 무게가 얹혔다. 가운데 물길에서 소설로 읽은 ‘불만을 가질 이유 없는 짐의 무게’가 중도(中道)로서 다가왔다.

조금 쉽게 말하는 재주가 없음을 정말로 아쉬워하며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처음의 시에서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의 태도를 보았기에 성자 싯다르타가 생애 초반 실컷 맛본 쾌락주의와 연결해 보았다. 산다는 게 ‘대략난감’ 힘든 일들 연속이지만 인생에는 즐거움 또한 많으니 그럭저럭 무게감 즐기며 걷자는 마초적 남성의 듬직한 권위 듬뿍 실린 권유(倦游)가 그럴듯한 호소력을 발휘하더라는 얘기다.
반면 대칭의 곳에서 들려온 한 없이 애절한 무게감을 호소한 목소리는 출가 이후 6년, 인간 한계를 넘어선 고통으로 점철(點綴)된 고행주의와 이어졌다. 그러한 시각에 따르자면 덧없는 인생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길은 몸에 고통을 주어 삶은 괴로움일 뿐임을 거듭거듭 절감하는 일이다. 그렇게 고행을 통하여야만 우리는 고해(苦海)인 인생에서 해탈(解脫)하는 길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태자 시절 최고의 쾌락과 출가하여 상상을 절하는 6년의 고행을 차례로 겪으며 성자께선 즐거움과 괴로움의 두 길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이전의 어느 ‘사람’도 하지 못했던,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경험했지만 그것들은 결국 해탈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분명히 자각했다. 드디어 양 극단을 배제한 중도를 발견하시매 성자는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되었다.

상당수가 일본에 대해 극단의 민족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에게선 하필 일본 소설에서 중도의 냄새를 맡을 필요가 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더구나 요즘 아베나 그 주변 허섭쓰레기 같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막돼먹은 수음(獸音)들을 들을라치면 일본이란 나라는 구제불능이라는 느낌 벗기 어렵다. 그러기에 더욱 그들의 선조 중에 이런 인물도 있다는 발견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 소설에 진정성이 담겼다면 그 발언에서 느껴지는 중도적 깨달음이 사뭇 높아 발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심정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을 눈물과 감동으로 수놓는 기적의 영화가 있다. 이 영상물은 일본군의 노리개로 살아야 했던 주인공들의 원통함을 위무한 최고의 명화라고 생각한다. 비록 여기 프놈펜의 극장에선 아직 볼 수 없으나 관련 기사와 소개 영상들만 보아도 나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 일부에 야한 영화로 규정하고 그런 장면만 모아 보자는 류의 반응들이 있다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한 자들은 성고문조차도 성욕 대상으로 보는 인두겁 쓴 짐승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만일 전체를 보게 한다면 그들조차를 사람으로 만들 힘이 있는 작품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형상을 지닌 자라면 내치기보다 끌어들여 보게 하기를 바란다. 감독의 어떤 인터뷰에서 분개(憤慨)의 정서보다는 일본 우익조차도 납득할 만큼의 설득력을 담으려 노력했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 일본인들이 소설 통해 내가 예절 바른 일본 근대인들을 만들어낸 시조(始祖)로 이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이 맞다면 그들과 손잡고 사람 향기 물씬한 이 영화를 보고 싶다. 동서양 인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었던 ‘쉰들러 리스트’와 동급(同級)의 영화임을 세계인 더불어 느끼고 싶다.
프놈펜을 떠날 때 5시간이면 족하다는 장담과는 달리 배는 8시간 가까이 항해하여 목적지에 다다른다. 이 나라 택시인 툭툭을 잡아타고 어디 가자고 하면 언제나 기사로부터 안다는 대답을 듣지만 엉뚱한 곳으로 가기 일쑤다. 이러한 장면들은 어쩌면 오늘의 캄보디아인들이 맛보여주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의 허탈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여행한 삼사십 명은 거의가 서양인이었다. 동양인이 가뭄의 콩처럼 찾기 어려웠으니 한국 사람은 당연히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국적이 아니라 동행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중도의 물길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람들’의 고향으로 ‘귀향’하는 ‘사람’의 향기였다./한유일 (교사, shiningday1@naver.com)

 

지붕에 얹힌 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