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인간의 가능성 되찾은 날

기사입력 : 2016년 02월 18일

고단한 인간의 길

‘삼월하늘’은 대한민국 사람 누구에게나 한 분의 ‘누나’를 떠올리게 한다. 노래 가사에 따르면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를 불렀다는 그분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만세’를 불러 옥에 갈 일은 없는 오늘의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인터넷에 그분의 성함을 입력하면 차마 여자에게 그럴 수는 없는 고문의 내용이 나온다. 그것의 사실 여부는 그만두고도 가해진 다른 고통들이 어마어마해 귀와 코를 면도칼로 잘라낸 기록까지 있다. 그럼에도 그분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언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를 독자들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처음엔 ‘삼일절 무엇을 기뻐해야 하나’를 제목으로 하려 했었다. 그러다 나라가 가지는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취지로 질문에서 답으로 그 제목을 바꾼 것이다. 다른 민족의 억압을 벗어나 자유로움 안에서 인간의 길을 추구할 가능성이 나라가 국민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열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그러매 비록 평범한 우리가 열사처럼 하지는 못하더라도 삼일절 맞으며 나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정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감히 1948년을 건국의 해로 하자고 한다면 열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열사께서 가슴에 품은 ‘1919년의 그 나라’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식민지(植民地), 대다수 모든 국민의 ‘인간 가능성’이 막히고 적게는 5만 많게는 20만으로 추산되는 꽃다운 여성들이 일군(日軍)의 노리개가 되어버린 그 시대를 우리나라의 근대화 태동기로 보려는 윤똑똑이들이 있다. 그들은 식민지 정권의 간택(揀擇)을 받아 짐승처럼 취급되던 일반 국민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간 비슷하게 대접받았기에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자신들 외 동포들의 처참함을 외면하거나 유도(誘導)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는 그러한 행동에 의거해 그들을 ‘선각자’ 아닌 ‘앞잡이’라 부르는 것이다.

건기의 복판을 지나고 있는 프놈펜은 요즘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지낼 만하다. 한낮이야 여전히 덥지만 늘상 빛나는 태양 아래서 시민들의 얼굴은 대체로 평안해 보인다. 만연한 부정부패에 정권 교체의 가능성 보이지 않음에도 그렇게 행복한 것이다.
근대 캄보디아 역사를 살피다 보면 베트남과 태국의 등쌀에 못 이겨 프랑스에 식민지를 요청한 정황도 읽힌다. 그러나 막상 식민지가 되고 보니 나라 잃은 설움이 상상을 넘었다. 결국 독립을 원하게 되고 어떻든 독립이 되고 보니 이만큼이라도 행복의 미소가 가능한 것이다.
나라의 의미란 이와 같아서 다른 민족에 강탈당하고 보면 그 민족과 동등한 대접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예외 없이 이를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표현은 온 겨레 합의하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하여 나라에 무조건 충성하자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국민에게 억압 없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에는 감사하되 국가가 정당(正當)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게 옳은 길이다. 단순히 정권 담당자들을 지지하는 일은 국가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성의 자유로운 발현(發顯)을 보장해 주는 국가에 보답하는 행동은 그것을 실현해 그러한 인간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거기서 반 발짝쯤 더 나아가 다른 국민들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돕는 삶을 산다면 비단에 꽃을 수놓는 미행(美行)이 될 것이다.
여기서 자칫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선행(善行)이 집단에 갇히는 일이다. 예컨대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하지 않는다며 일본인 전체를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 된다. 또는 종교가 같거나 동향인 사람을 무조건 선출(選出)하는 것 같은 우행(愚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캄보디아에도 선교를 위해 많은 한국분들이 나와 있다. 어떤 분들은 어리석은 저들이 선교자의 종교를 받아들여 개종하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오답 아닐까. 다른 한편에선 원주민들이 자신들 종교를 간직하되 보다 올바른 인간이 되기를 기도하는 바 이것이 정답에 가깝다.
방향을 오늘로 돌려 새로운 세기의 삼일절에 일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운 길의 구체적인 해법은 무어냐 물을 수 있다. 나는 개인이 가진 사상이나 종교나 국적까지를 떠나서 그가 인간의 길을 얼마나 실천(實踐)하고 있는가가 판단 기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열사께서 겪으신 고초(苦楚)를 생각하면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만 보아도 분개하게 되는 감정을 공감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위해서는 냉정한 논리로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는 게 급선무(急先務)이다. 또한 소수일망정 일본 내 양심적 일부는 공부를 통해 자신들 선조의 일부가 저지른 짐승의 악행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 그들에겐 연대(連帶)의 손길로 힘을 실어주어 그들을 다수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일본인이어서 증오하는 게 아니라 반성하지 않는 아베와 그 똘마니들을 문제 삼아야 한다.
초나라의 한 왕이 사냥터에서 잃은 활을 찾다가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니 그냥 두라고 하여 넓은 도량으로 신하들을 감동시킨다. 이를 전해들은 공자는 ‘초나라 사람’에서 ‘초나라’를 빼고 ‘사람’으로 했더라면 더욱 훌륭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캄보디아인이든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을 떠나서 사람 모양 인두겁을 뒤집어쓴 자들의 악행은 미워하되 ‘사람’의 선행의 경우에선 국적(國籍)이란 따질 필요가 없는 흔적(痕迹)일 뿐이다./한유일(교사, shiningday1@naver.com)

바삭 강변의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