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이 보는 세상] 만리정글답파기

기사입력 : 2015년 05월 14일

중국설

하나의 제목으로 10권 또는 그것을 넘기도 하는 대하소설을 여럿 쓴 작가가 있다. 도합 몇 백 쇄를 찍어낸 일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내가 그를 존경하는 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기록 때문이 아니다.
어떤 대담에서 그는 군대 생활 때 곡괭이 자루로 50대를 맞은 경험을 술회하였다. 갑자기 엄혹(嚴酷)했던 1980년대 초반 전투경찰로 국방 의무를 해낸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전경은 구타로 자주 구설에 올랐지만 나는 이 작가처럼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그랬음에도 작가는 독자인 아들을 ‘당연하게’ 군에 보냈다. 훗날 일간지 칼럼을 통해 그는 자신의 그러한 고지식함을 무능과 못남이라 스스로 질타하면서 무녀독남인 자식을 현역으로 입대시켰던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병영의 폭행 문화로 얻은 목디스크를 몇 년째 치료하는 모습을 곁에서 안타까이 바라보는 심정도 적었다.

우리 사회 이른바 지도층이란 사람들은 유난히도 자식들의 현역 입대 비율이 도드라지게 낮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민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 애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 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부친대에서부터 대물림된 무능이라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게 한 자신의 고집스런 국가관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부른다. 적절한 번역어로 어감 대체가 어려워 나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국방의 현주소를 보면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처참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징집 해당자 대다수가 왜 우리만 군에 가야 하나 저항한다 해도 말릴 논리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위로 갈수록 심해지는 대한민국의 도덕적 해이(解弛)가 참으로 아쉽지만 그럼에도 어울려 만든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먼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런 생각에 걸맞게 우리 가족은 아버지 때부터 그분의 손자들 대에 이르기까지 작가 집안처럼 삼대에 걸쳐 현역의 의무를 모두 당당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내가 작가처럼 곡괭이 세례를 받았다면 아들들의 현역 입대를 말리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작가는 단재 신채호나 만해 한용운을 통해 무녀독남의 인생관을 잡아주고자 했다고 적었다. 나 역시, 존경하는 그 분들을 밥상머리에서은연중에 강조했으리라 싶어 통하는 반가움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은 돈 안 되고 힘만 드는 그러한 자식 교육을 시대에 뒤떨어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그렇지만 내 애들이 귀하면 남의 자식들도 귀하다는 단순한 원칙은 지켜져야만 한다. 남들 핑계 대며 자신들의 부당함을 정당화하는 게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남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나 먼저 원칙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인간다운 인간이다. 고통스런 원칙 지킴의 어려움을 가벼이 밀어내고 사뭇 당연하고 당당하게 실천한 그 흔들림 없는 행동의 빛남이 내가 작가를 존경하는 지점이다.
인문학 강의 자리에서 작가는 무엇이 행복인가를 청중들에게 묻는다. 1인당 GDP 2만 5천 달러를 넘어서도 여전히 행복지수 하위권인 뒤틀린 한국을 꼬집는다. 우리의 35년 전 수준 국민 소득인 캄보디아가 1위로 행복한 이유는 무얼까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와 나는 일면식은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사연인즉 그의 한 강연에서 앞줄에 앉아 경청하고 강연 뒤에 한두 마디 얘기를 나눈 일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작가는 기억도 못할 일이니 만나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안 만났다고 하기도 어려워 이렇게 적어보는 것인데, 가끔씩 몇 십 몇 백 면식도 꿀꺽 집어삼키고 “일면식도 없다”고 잡아떼는 정치인들을 볼라치면 그들 낯짝은 저 위대한 포철의 고강도 철판으로 만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농부가 길을 가다 늪지에 빠져 위험에 처한 신사를 그냥 지나쳐 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당신처럼 착한 이가 어찌 그 남자를 구하지 않았는가 의아해서 물었다. 농부는 그와 몇 마디 나누던 중 자신이 유명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며 “그가 숨이 붙어 있다며 구해달라 하는데 정치인들의 말은 하도 거짓이 많아 살았다는 그 얘길 믿을 수가 있어야지.” 태연하게 말하더라는 우스개가 가슴을 쓰리게 한다.
5월에 들어서며 걷는 일도 힘겨운 노동이 되는 프놈펜의 거리를 바라본다. 더위만으론 부족할세라 여기 정치인들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거짓말 잘 하고 부정부패 또한 타국에 뒤질세라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행복한 웃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현지인들 보면 짜증이 나는 일면,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분노로 일그러뜨리며 헛되이 보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그게 현명함이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니 내가 심하게 더위를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작가의 또다른 긴 호흡의 소설 하나를 묵직한 느낌 받아가며 고맙게 읽었다. 중국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준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니 반갑다.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읽은 가장 좋은 책 하나를 추천하라면 그의 대담집 “시선(視線)”을 들겠다.
‘일면식’으로 얻은 그의 인상은 ‘글감옥’ 수형 생활을 통해 머리가 벗겨진 ‘젊은 노인’이었다. 나보다 17년 세상을 더 살아 고희(古稀)를 넘긴 그는 내 눈에 나보다도 훨씬 젊어 보인다. 그 팔팔한 의식과 깨어있는 정신이 사뭇 부럽고 그래서 여러분께도 일깨워드리고 싶었다.
‘태백산맥’의 장엄함과 ‘한강’의 유려함과 ‘아리랑’의 정신으로 중국의 오늘을 탐험한 이야기가 있다. 그 생생함과 유익함은 동물 아닌 인간만이 지닌 책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하였다. 신나게 만리 정글을 답파(踏破)한 기록을 왜소한 글로나마 여러분께 전한다.  / 한유일 shiningday1@naver.com

 

사원으로 오르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