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우칼럼] 프놈펜이 뛰고 있다

기사입력 : 2014년 0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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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은 인구 170만 명의 캄보디아 수도다. 프놈펜을 빼고는 3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의 중심인 주도라 하더라도 몇 만에서 몇 천 명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에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프놈펜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프놈펜은 캄보디아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도시 중심의 상업과 각종 비즈니스, 도시 주변에 형성된 공업 지대 등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경제 중심의 도시이기도 하다. 앙코르와트 관광 산업을 빼고는 캄보디아의 주요 경제 활동이 프놈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프놈펜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최근 프놈펜은 리모델링중이다. 여기저기 주거용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이에 발맞춰 중대형 상점과 식당들이 앞 다투어 문을 연다. 몇 년 사이에 거리의 밤 풍경이 훨씬 밝고 화려해졌다.

프놈펜이라는 이름의 연원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펜’ 할머니가 강에 떠내려 오는 부처를 건져서 언덕(프놈)에 절을 짓고 그곳에 부처를 모셨는데 그곳이 지금의 왓프놈이요 그 때부터 ‘펜 할머니의 언덕’이라는 뜻이 담긴 고을 이름인 프놈펜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후 15세기 초에 앙코르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외세에 밀리고 밀려서 크메르 왕궁은 잠시 프놈펜에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곧 인근의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1866년 노로돔 왕에 이르러 다시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노르돔 왕이 즉위한 때는 이미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편입된 시기였기 때문에 프놈펜은 프랑스의 영향 밑에서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오랜 세원이 지났지만 지금도 도시 구조나 도로, 일부 건축물 등에 프랑스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프놈펜의 역사는 질곡으로 얼룩져 있다. 100년 가까운 프랑스의 보호 통치, 50여 년간의 잦은 정권 교체와 내전 등을 거치면서 가장 치열한 아픔을 겪은 곳이 프놈펜이다. 왕조의 퇴락과 외세의 침탈, 잦은 정변과 대량 학살 등 어두운 역사가 프놈펜의 근세사를 장식했다. 특히, 크메르루즈가 집권한 1975년부터 3년 7개월 동안 프놈펜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다. 200만 명에 가까웠던 도시 인구 거의 대부분이 불과 며칠 사이에 농촌 지역으로 강제 추방되면서 수십 만 명이 희생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지식인과 상공인, 교육자, 전문직 등은 크메르루즈의 1차 살육 대상으로, 프놈펜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가장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1년 파리 평화조약에 의해 캄보디아는 국가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따라서 수도 프놈펜이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보면 된다.

5,6년 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프놈펜의 스카이라인은 완전히 바뀌었다. 30층 이상의 건물이 여러 개 들어섰고 시내 곳곳에 아파트와 대규모 주거 단지가 자리를 잡았다. 우중충하던 상가가 산뜻하게 바뀌고 중대형 쇼핑몰이 크게 늘어났다. 한 때 주춤했던 건설 경기가 다시 살아나 도시 전체가 리모델링되고 있는 듯하다. 도로도 많이 정비되고 주요 도로에는 가로등과 교통 신호등이 속속 설치되고 있다. 상습 교통체증 지역에는 고가도로도 놓였다. 우기만 되면 곳곳이 물구덩이로 변하던 이면도로도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피자나 햄버거 등 외국계 패스트푸드점이나 중대형 음식점과 패션숍들이 계속 문을 열어 도시가 한층 화려해졌다. 이에 맞춰 인구 유입도 크게 늘어나고 집값 땅값 상승률도 매우 높다. 빈곤과 치욕으로 얼룩졌던 도시 프놈펜, 다시 앙코르의 영화를 꿈꾸며 힘차게 뛰고 있다. / 한강우 한국어전문학교 교장